20201228 비상식의 세상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시 4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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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28(월)
“비상식의 세상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시 41:1-13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1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에게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를 건지시리로다
2 여호와께서 그를 지키사 살게 하시리니 그가 이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 주여 그를 그 원수들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3 여호와께서 그를 병상에서 붙드시고 그가 누워 있을 때마다 그의 병을 고쳐 주시나이다
4 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나를 고치소서 하였나이다
5 나의 원수가 내게 대하여 악담하기를 그가 어느 때에나 죽고 그의 이름이 언제나 없어질까 하며
6 나를 보러 와서는 거짓을 말하고 그의 중심에 악을 쌓았다가 나가서는 이를 널리 선포하오며
7 나를 미워하는 자가 다 하나같이 내게 대하여 수군거리고 나를 해하려고 꾀하며
8 이르기를 악한 병이 그에게 들었으니 이제 그가 눕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 하오며
9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10 그러하오나 주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고 나를 일으키사 내가 그들에게 보응하게 하소서
11 내 원수가 나를 이기지 못하오니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12 주께서 나를 온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원히 주 앞에 세우시나이다
13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할지로다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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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에서 종종 접하는 기사가 있습니다.
주행 중이던 트럭이 방향을 틀다가 미끄러지거나 무게중심을 잃어 뒤에 실었던 짐이 도로에 쏟아져 버렸는데,
주변에 있던 시민들이 하나 둘 씩 모여서 마치 자기 일인양 힘을 모아 도와서 순식간에 그 자리가 정리가 되었다는 기사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유튜브를 보면 그런 기사와 영상들에 대한 외국인들의 반응을 모아둔 영상이 있습니다.
시민들이 돕는 이런 영상을 본 외국인들의 반응은 놀랍습니다.
이런 일들이 자신들의 나라에서 일어났다면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을 것이라 말합니다.
그러면서 함께 회자되는 영상이 있습니다.
중국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과일을 싣고 도로를 달리던 트럭에서 과일 상자가 쏟아져 버렸습니다.
역시 트럭 주변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데, 오히려 그 사람들이 트럭기사를 도와 과일을 정리하고 싣는 것이 아니라
자기 것을 챙겨서 돌아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더 많이 가져가려고 집에서 수레를 가져와서 실어가기도 하였습니다.
그 자리에 경찰이 와서 지켜보고 있지만 아랑곳 하지 않았고, 결국 트럭기사는 망연자실 했다는 것입니다.
그와 함께 한국인들의 시민 의식에 대한 칭찬이 이어졌습니다.
연약한 사람을 돕는 것, 어려움을 당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상식입니다. 도덕적인 모습이죠.
그러나 그 당연한 일이 기사화되고, 그것이 이슈가 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의 시인도 그런 상황에 있습니다.
연약한 사람을 향하여 선을 행하였으나 그것이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공격당하는 상황
그 속에서 결국 의지하고 찾아갈 곳은 우리 주님임을 고백합니다.
◎ 선을 행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 (1~3)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를 선포함으로 시작합니다.
1절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에게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를 건지시리로다
“복이 있음이여”
시 1편이 같은 말로 시작됩니다.
시편 1편부터 오늘 41편까지를 시편에서 1권으로 분류되는데,
그 1편의 시작과 끝에 복을 언급했다는 것은
이 시편 1권이 누가 복 있는 자며, 어떻게 하는 것이 복된 삶인가 하는 주제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려 줍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합니다.
(시 1:1~2)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길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 사람이라고 하는데,
오늘 말씀에서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로 구체화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도우시고, 건지신다 선포합니다.
‘가난한 자는 세상, 사회에서 힘이 없습니다. 아무런 영항력도 없는 약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가난한 자를 보살핀다는 것은 그들로부터 그 선행에 대한 보답을 돌려받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행하는, 말 그대로 선함을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행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그러한 행동은 어디로부터 비롯된 것인가요?
여호와께서 건지시고, 복을 주시는 이런 행위는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것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잠 14:31)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공경하는 자니라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공경하는 자니라”
다시 말해 주를 공경하는 사람, 여호와를 경외하고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가난한 사람을 돕는다고 말하는 것입이니다.
이런 차원에서 오늘 가난한 사람을 보살피는 자는 복이 있다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나타나는 선함의 근거는 하나님을 사랑함에서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25: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에게 생수 한 사발 주는 것,
먹을 것이 없는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이 바로 주님께 행한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2절 여호와께서 그를 지키사 살게 하시리니 그가 이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 주여 그를 그 원수들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3절 여호와께서 그를 병상에서 붙드시고 그가 누워 있을 때마다 그의 병을 고쳐 주시나이다
이렇게 연약한 자들을 돕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선대하십니다.
그리고 지금 이 복을 받을 자, 도우심을 필요로 하는 자가 누구인가 드러냅니다.
바로 시인 자신이라고 합니다.
4절 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나를 고치소서 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그 선한 사람,
하나님께서 건지시고, 지키사 복을 받고, 병을 고쳐 주신다고 고백되는
그에 해당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고 알리며 주님의 도움을 구합니다.
1~3절의 믿음의 고백이 자신에게 이뤄지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 선함을 악으로 갚는 세상 (5-9) - 주님의 은혜가 요구됨.
5절 나의 원수가 내게 대하여 악담하기를 그가 어느 때에나 죽고 그의 이름이 언제나 없어질까 하며
6절 나를 보러 와서는 거짓을 말하고 그의 중심에 악을 쌓았다가 나가서는 이를 널리 선포하오며
7절 나를 미워하는 자가 다 하나같이 내게 대하여 수군거리고 나를 해하려고 꾀하며
8절 이르기를 악한 병이 그에게 들었으니 이제 그가 눕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 하오며
시인은 믿음에 대한 진술에서 이제 자신의 현재 상황으로 관심을 돌립니다.
시인의 상황은 주님의 말씀에 따라, 주님을 경외함에 따라 선을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공격받고 비방당하는 상황에 있습니다.
원수가 시인을 향하여 악담합니다.
거짓으로 시인을 속이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퍼뜨립니다.
뒤에서 수군거리며 시인을 비방하고 욕합니다.
그리고 그가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고 저주를 퍼붓습니다.
그러나 이런 많은 공격 중에서도 시인을 가장 괴롭게 하는 사실은 무엇인가요?
바로 나를 공격하고 나를 비방하고, 나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그 악한 사람들 가운데에
나의 친구가 있다는 것입니다.
친한 친구로부터의 배반.
9절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
나와 함께 먹고 마시며, 많은 시간을 나와 함께 보내고,
영원히 내 편인 줄 알았던 그 친구가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이것은 적대적인 감정과 거만함, 폭력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옛 말이 뼈에 사무치도록 들어맞습니다.
친구, 함께 힘이 되고 의지할 그 존재가 나에게서 등을 돌리는 현실
시인을 비참하고, 절망하게 만드는 상황입니다.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이 상황에서
시인은 결국 주님께로 돌아갑니다.
의지해야 할 분이 결국 주님 밖에 없음을 고백합니다.
◎ 의지할 굳건한 반석, 우리 주 하나님
10절 그러하오나 주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고 나를 일으키사 내가 그들에게 보응하게 하소서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친구도 나를 배반하는 상황이 있지만
시인에 대하여 악으로 대하는 그들을 향해 보응하시고
나를 다시 일으키시고, 살리시며, 선으로 갚아달라고 고백합니다.
11절 내 원수가 나를 이기지 못하오니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12절 주께서 나를 온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원히 주 앞에 세우시나이다
결국 시인은 1~3절에서 자신이 선포하고 언급한 믿음으로 되돌아 갑니다.
내 원수들이 나를 공격하여도 그들이 나를 이길 수 없는 것은
나의 선한 이 행위가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자신을 온전히 붙드실 것을 믿는 가운데에서 나아갈 곳은 “주 앞”이라고 고백합니다.
코람데오
그것이 믿음의 자녀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입을 드러냅니다.
이 시인 다윗은 또 다른 자신의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시 23: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주님은 친히 원수들의 앞에서 주님의 백성을 높이시고, 복을 더하여 주시는 분이심을 이미 알게 때문에
지금 이 어려움 가운데에서 직접 대응하고, 대처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 나아가
주님께서 보응하시고 갚아주시길 구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 가운데, 믿는 바대로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
그것은 당연하고 상식적인 것이지만
세상은 악하여 져서 오히려 그것을 질타하고, 당연한 것이 아닌 특이하고 이상한 것으로 여깁니다.
믿을 사람 하나 없는 어두운 세상 가운데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에게 복이 있다
악인의 길을 따르지 않는 자에게 복이 있다
작은 자 한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 나에게 베푸는 것이라 하십니다.
이 세상의 상식, 가치관이 아닌
주님이 우리에게 복주시고, 보응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친히 은혜 베풀어주시는
그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써
오늘도 이 세상의 법칙, 논리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 선하심을 따르며 세상을 이기고
이 세상에서 특이하다, 이상하다 여겨질 지라도
그렇게 믿음 가운데 서서 구별되어 사시길 바랍니다.
찬송가 394장 “이 세상의 친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