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806 몸으로 살아내는 기독교 사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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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6일 매일성경]
몸으로 살아내는 기독교
사 20,1-6
사20:1 앗수르의 사르곤 왕이 다르단을 아스돗으로 보내매 그가 와서 아스돗을 쳐서 취하던 해니라
사20:2 그 때에 여호와께서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갈지어다 네 허리에서 베를 끄르고 네 발에서 신을 벗을지니라 하시매 그가 그대로 하여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니라
사20: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종 이사야가 삼 년 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며 애굽과 구스에 대하여 징조와 예표가 되었느니라
사20:4 이와 같이 애굽의 포로와 구스의 사로잡힌 자가 앗수르 왕에게 끌려갈 때에 젊은 자나 늙은 자가 다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볼기까지 드러내어 애굽의 수치를 보이리니
사20:5 그들이 바라던 구스와 자랑하던 애굽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놀라고 부끄러워할 것이라
사20:6 그 날에 이 해변 주민이 말하기를 우리가 믿던 나라 곧 우리가 앗수르 왕에게서 벗어나기를 바라고 달려가서 도움을 구하던 나라가 이같이 되었은즉 우리가 어찌 능히 피하리요 하리라
계속해서 여러 나라들에 대한 심판 메시지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23장까지)
오늘 20장에서는
애굽과 함께 구스, 즉 지금의 에디오피아 사람들이 어떤 고통을 당할 것인지를 말씀하십니다.
1. 앗수르-아스돗 진멸 사건
사20:1 앗수르의 사르곤 왕이 다르단을 아스돗으로 보내매 그가 와서 아스돗을 쳐서 취하던 해니라
잠시 이스라엘 지도를 머릿 속으로 떠올려 보면,
이사야 당대 이스라엘, 즉 팔레스타인 북동쪽에는 앗수르 제국이 있습니다.
남쪽 어제 언급한 애굽이 위치하고 있지요
이스라엘 동쪽에는 암몬, 모압, 에돔이 북쪽부터 남쪽으로 자리합니다.
이스라엘 서쪽, 지중해 연안에는 철천지 원수인 블레셋 4개 도시 국가들이 자리했습니다.
우리가 이사야 7~9장에서 보았듯이
기원전 735년에 북이스라엘왕 베가와 아람왕 르신이 유다를 침략했다고 했습니다.
당시 북이스라엘은 북쪽에 이웃한 시리아(아람)와 동맹을 맺고 반 앗수르 연합을 구축했지요. 이사야의 나라 유다, 당시 왕 아하스는 앗수르를 의지했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앗수르가 강성했던 대제국이었습니다.
그 때 블레셋의 한 부족국가 중 하나인 아스돗이란 곳이 있습니다.
사무엘상에 보면, 엘리 제사장이 이스라엘의 사사였을 때 그 두 아들로 인해 블레셋에 법궤를 빼앗긴 적이 있습니다. 법궤를 아스돗의 다곤 신상에 두었었다가 그 성읍에 큰 재앙이 닥친 적이 있죠.
그 때의 성읍이 바로 아스돗입니다.
지금 이사야 당시 이 아스돗의 지도자가 아주리(Azuri)란 왕인데 애굽과 구스인들을 포함한 앗수르 동맹을 결성해서 앗수르에 강력히 저항했습니다. 그런 상황에 기원전 713~711년에 앗수르 황제 사르곤 2세는 곧바로 원정군을 보내어 아스돗을 진멸했습니다.
오늘 1절의 시기가 바로 이 시기이고 이 전쟁의 결말이 4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사20:4 이와 같이 애굽의 포로와 구스의 사로잡힌 자가 앗수르 왕에게 끌려갈 때에 젊은 자나 늙은 자가 다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볼기까지 드러내어 애굽의 수치를 보이리니
2. 징조-행위
이런 상황에 선지자 이사야는 유다왕과 백성들을 향해
애굽과 구스를 의지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특징적인 모습이 나옵니다.
사20:2 그 때에 여호와께서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갈지어다 네 허리에서 베를 끄르고 네 발에서 신을 벗을지니라 하시매 그가 그대로 하여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니라
선지자 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이니, 벌거벗고 살아야 합니다.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하면 너희들이 이처럼 가난하고 헐벗은 비참한 삶을 살 것이니 애굽과 아스돗이 동맹을 결성하는 것도, 유다가 그들을 의지하는 것도 헛된 것이다. 라는 것을 몸으로 보여줘야 합니다.
그런데 기가 막히는 것이 잠깐 연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양 이 꼴로 3년을 지내야만 합니다.
이것을 ‘징조-행위’ 라고 명하는데요,
입술의 말로 하나님의 예언을 전하는 것 만이 아니라,
실제로 이루어질 예언을 선지자가 직접 살아내는 것입니다.
우상과 결탁하여 음란해진 나라 이스라엘을 향한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선지자 호세아는 어떻게 해야만 했죠?
그 순결한 숫총각 호세아가 음란한 여인 고멜과 결혼을 합니다. 애도 3이나 낳습니다. 고멜은 애를 그렇게 낳고도 계속 매음굴을 찾아가고 남편 아닌 다른 남자들에게 사랑의 몸부림을 칩니다.
남편 호세아가 애 3을 끌어안고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예레미야 선지자는 또 어떻습니까?
유다왕 시드기야에게 당신이 배신한 바벨론왕에게 포로가 되어 멍에를 메게 될 것이라고 말만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시드기야 왕 앞에 갈 때 선지자에게 직접 멍에를 메고 그 예언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나훔 선지자에게는 입고 있는 치마를 들어올려 그 수치스러움을 나라들에게 직접 보여주라고도 하십니다.
하나님은 언어로만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이따금 선지자에게 이런 기괴한 행동을 요구하셨습니다.
그 행동은 하나님의 예언을 더욱 생생하게 강력하게 전달하는 수단이 되었지요.
그런데, 선지자는 도대체 무슨 잘못입니까?
그래서 오죽 하면, 선지자로 부름 받는 일을 주저하고 요나처럼 내팽겨치기도 하지 않습니까?
유다도 우리나라와 비슷한 위도에 위치하고 있어
이사야는 겨울이면 매서운 추위를, 또 여름이면 이 숨이 턱턱 막히는 더위를 견뎌야만 했습니다. 3년 동안이나 말이죠.
여기서 저와 여러분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자들은, 철저히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이사야가 이것을 거절하거나 회피하는 모습이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3년을 벌거벗은 몸으로 살아야하는 수치와 모멸감,
또한 그런 몸으로 견뎌야 하는 육신의 고통
이런 것들이 분명 예견됨에도 불구하고, 선지자는 묵묵히 순종합니다.
그런 선지자의 수고와 헌신이 있었기에, 유다에 남은 자들이 있게 되고
희망의 날, ‘그 날에’ 복음의 나라, 하나님 나라와 성취됩니다.
죄악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참됨을
기독교 신앙의 진실성을 무엇으로 입증할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 그 몸으로 이 땅에 내려오시고, 그 몸으로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신 것처럼, 말씀 전하는 목사나, 말씀 받는 성도나
몸으로 이 말씀을 살아내지 않고서는 이 신앙은 설득력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예수의 심장을 가진 자들은 예수의 피, 보혈을 흘려 보내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가 디딘 이 이동읍에서, 살아가는 일터에서, 또 우리 가정에서
복음 가진 자로서 살아갑시다.
“각자 소견에 옳은 바를 거침없이 말하고, 자기 뜻대로, 자유대로 사는 이 시대에”
주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던지, 묵묵히 순종하며 인내하는
성도의 참됨을
나타내는 저와 여러분 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