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408 [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회 3일] 부끄럽지 않은 십자가 막 14:5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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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4:53–72
53그들이 예수를 끌고 대제사장에게로 가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다 모이더라
54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들어가서 아랫사람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더라
55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증거를 찾되 얻지 못하니
56이는 예수를 쳐서 거짓 증언 하는 자가 많으나 그 증언이 서로 일치하지 못함이라
57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예수를 쳐서 거짓 증언 하여 이르되
58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 동안에 지으리라 하더라 하되
59그 증언도 서로 일치하지 않더라
60대제사장이 가운데 일어서서 예수에게 물어 이르되 너는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
61침묵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거늘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이르되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
62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63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64그 신성 모독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니 그들이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고
65어떤 사람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고 주먹으로 치며 이르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고 하인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
66베드로는 아랫뜰에 있더니 대제사장의 여종 하나가 와서
67베드로가 불 쬐고 있는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68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 하며 앞뜰로 나갈새
69여종이 그를 보고 곁에 서 있는 자들에게 다시 이르되 이 사람은 그 도당이라 하되
70또 부인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도당이니라
71그러나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72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그 일을 생각하고 울었더라
▣ 도입
고난주간 셋째 날 이 새벽에도 주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 제목은 ‘부끄럽지 않은 십자가’입니다.
부끄럽지 않은 십자가, 다른 말로 당당한 십자가, 담대한 십자가입니다.
여러분은 십자가가 부끄럽습니까? 아니면 자랑할 수 있는 십자가입니까?
사실, 요즘은 기독교인으로 살아간다는 그 자체가 고난입니다.
한 30여년전만 해도, 기독교인이라는 브랜드는 한국사회에서 도덕적 우위를 점하는 긍정의 아이콘 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그냥 교인이라고 밝히는 그 자체가 주저되는 지점이 많이 있습니다.
단지 복음이 부끄러워서가 아닙니다.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 복음을 제시하기 위해 우리는 많은 고민을 해야 하는 시절입니다.
고난주간만 고난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 세상 속에 산다는 것, 매 순간이 고난입니다.
우리는 어제 악인과 의인의 두 모습, 뚜렷이 대비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도, 이 대비는 좀 더 구체화됩니다. 이러한 대비를 발견하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를 향한 세상의 조롱, 폭력과 핍박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저는 이 시간 분명히 고백합니다. 여러분, 십자가는 결코 부끄럽지 않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그리스도인됨은 결코 부끄럽지 않습니다.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 서론
자, 오늘 본문은 두 토막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 공회 앞에서 재판받으시는 예수님 (53-65 자기를 증명하시는 예수님)
(2) 사람 앞에서 판단받는 베드로 (66-72 세 번 부인하는 베드로)
주님은 공회 앞에서 자신을 증명하십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사람 앞에서 주님을 부인합니다.
▣ 본론 :
왕이 심문을 받다. : 종교지도자들의 불법
첫 번째 이야기입니다.
겟세마네에서 체포되신 예수님께서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으로 끌려 가십니다.
여기에 이미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들’ 이 모여 있습니다.
모든 상황이 예정되었고 조작된 것입니다.
사실, 이 모임은 불법적인 모임이었습니다.
종교 법정인 공회의 대표들로서, 이들은 정식으로 종교 재판을 할 수 있습ㄴ디ㅏ.
정식 공회는 오전이나 오후, ‘성전의 집회실’에서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미리 예고된 모임이어야 하고, 정족수를 채워 개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이 종교 재판은 그런 적법한 절차와 방식을 어기고 있습니다.
이 재판에서 오가는 피고 예수에 대한 모든 증언들도 서로 일치하지 않습니다.
막14:55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증거를 찾되 얻지 못하니
막14:56 이는 예수를 쳐서 거짓 증언 하는 자가 많으나 그 증언이 서로 일치하지 못함이라
판결에 영향을 줄 수 없는 위법한 것들 투성입니다.
무엇보다, 이 재판이 불법한 것은 지금 피고석에 앉은 분이 바로, 참된 왕 그리스도시란 사실입니다.
게다가, 어제 우리가 본 대로 불법적인 이 재판에 악이 횡행하는 사실입니다.
막14:53 그들이 예수를 끌고
막14:65 어떤 사람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고 주먹으로 치며 이르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고 하인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
: 폭력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막14:60 대제사장이 가운데 일어서서 예수에게 물어 이르되 너는 아무 대답도 없느냐 : 주님을 위협하며 대답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60. ...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
사실을 왜곡하고 있습니다.
막14:63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과격한 선동을 일삼고 있습니다.
이런 왜곡과 선동이 이 재판이 불법이고,
주관하는 제사장이 거짓 제사장임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불과 한 주 전, 주님은 참된 대제사장으로서, 거짓된 제사를 폐하시고,
위법한 제사장이 더럽힌 성전을 청소하셨습니다.
또 지금 이 순간,
참된 왕이, 참 재판장이신 그분이 지금 거짓 재판관들로부터 불법한 심문을 받는 이 장면, 이 그림 .. 얼마나 슬프고 기가 막힙니까...
2. 왕이 거부당하시다. : 베드로의 불법
두 번째는 베드로의 이야기입니다.
첫 번째 이야기가 왕이신 예수님이 심문을 받으시는 이야기라면,
두 번째 이야기는 왕께서 부정당하시는 장면입니다.
그것도, 그토록 사랑하시고 아끼시던 당신의 백성, 애제자 베드로로부터 말입니다.
주님이 체포당하시고 끌려가시는 사이, 제자들 모두가 다 주님을 버리고 도망하였습니다.(50)
그런데 54절에 베드로의 이름이 나옵니다.
막14:54 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들어가서 아랫사람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더라
무엇 때문에, 그는 그래도 주님의 뒤를 더듬고 있을까요?
분명한 것은, ‘멀찍이’입니다.
몇 시간 전만해도, 베드로는 이렇게 큰소리쳤습니다.
막14:29 베드로가 여짜오되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
막14:31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 ...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그런데, 이 멀찍이는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고 있을까요?
죄책감일까요? 호기심일까요?
지도자들의 재판이 밤에 은밀히 속개된 시각, 베드로도 은밀히 뒤따르고 있습니다. 멀찍이서 주님을 지켜보며, 상황이 더 불리해지면,
금방 도망갈 수 있는 거리에서 어떻게 되어가나..를 관망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 시대,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려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관망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산발랏과 도비야란 이들입니다. 이들은 함께 하지도, 그렇다고 멀리 떠나지도 않고, 옆에서 관망하며 그들을 모욕합니다.
이 또한 악인의 모습이죠.
이러니 베드로가 인간적으로는 이해되어도, 소극적인 자기 부정도 악입니다.
성도가 성도로 세상에 살면서, 자신을 빛과 소금으로 세상에 드러내지 않는 것조차도 하나님 앞에서, 주님을 부정하는 행위입니다.
마10: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이 베드로에게 상황이 악화됩니다. 그의 정체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의 악한 행동은 더 뚜렷해지고 있습니다. 사실을 왜곡하죠.
3번이나 주님을 부인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자신이 주님과 관계된 것을 부정합니다.
①막14:68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 하며 앞뜰로 나갈새
②막14:70 또 부인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도당이니라
③막14:71 그러나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지금 베드로는 예수님이 부끄럽습니다. 그와 관계되어 있다는 것이 부끄럽습니다.
사람들의 추궁이 반복될수록, 그 부끄러움은 혐오가 됩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불법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입니다.
명백한 9계명 위반입니다.
3년간의 세월이, 그토록 주님과 주고받았던 사랑과 교감은 다 사라져버렸습니다.
자기를 덮고 있던 홑이불이라도 있으면 차라리 덜 부끄러울까요?
종교지도자들의 불법, 베드로의 불법, 무엇이 더 악한 불의일까요?
3. 내가 그니라
불법과 망언으로 어두워지는 이 밤, 한 줄기 새벽빛이 비추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증언입니다.
막14:6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는 베드로의 위증을 예감하신 듯
어두움에 빛을 비추는 주님의 진실은 바로, “내가 그니라”입니다.
요한복음은, 내가 그다. 라는 주님의 증언을 집중, 반복해서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나는 떡이다. 나는 포도나무다. ... 7번이나 반복되는
주님의 자기 증언은 이미 이사야(40-55장)에서 예고된
메시야의 자기 성취, 자기 확립이었습니다.
그 예고를 확증하시면서, 주님은 참된 진실은 온 세상 앞에 당당히 두렴 없이 공포하고 계십니다. ‘내가 곧 그니라’
자기의 명예와 권력을 위해 자신의 위선을 은폐하는 종교지도자들,
상황의 불리함을 도피하고자 자신의 정체를 감추는 베드로와 달리
주님은 여전히 의연하시고 당당하십니다.
털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처럼, 오늘도 주님은 불의 앞에 대꾸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참된 의, 참 진리를 밝히 드러내십니다.
“내가 곧 그니라”
우리 주님은 결코 자기의 정체, 십자가로 대표되는 자신의 정체가 결코 부끄럽지 않습니다.
▣ 결론
고난주간 세 번째 날, 우리에게 주어진 밝은 태양 아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어떤 모습으로 나타낼 것입니까?
제가 어렸을 때 일입니다. 주일 아침, 교회 가는 길에 신호등에 서 있는
어떤 중년 신사가 양복을 입었는데 한 쪽 팔과 몸통 사이에 신문지에 둘둘 말은 벽돌을 끼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뭔가.... 저 아저씨는 근육 운동을 저렇게 하시나? 고민하던 중
교회에서 다시 그분을 보고 깨달았습니다.
교회 장의자 자리에 앉는 순간,
그 중년 신사가 신문지를 풀더니, 거기에 성경책이 나오는 것입니다.
요즘은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강단 화면에 다 틀어 주죠.
그러니 굳이 자기를 감추고 싶은 사람은, 무겁게 교회에 성경을 들고 갈 필요도 없어졌습니다. 부끄러워하고, 은폐할 이유가 더 강화된 것이죠.
악인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합니다. 자기 행위가 악하기 때문이죠.
요3: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요3:21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주님처럼 당당하게 삽시다.
코로나19로 인해, 교회를 향한 비난의 화살이 더 거세졌지요?
물론, 사회와 이웃을 향한 배려와 공공선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교회의 거룩성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모진 고난 가운데서도 왕의 존엄을 결코 놓지 않으십니다.
십자가 앞에서도 메시야의 품격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히브리서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우리도 그리스도인의 자존심, 십자가의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십시다.
주님의 고난은 부활의 영광을 예비한 것입니다.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 우리 또한 하늘 영광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진리로 담대한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 찬송 : 325장 예수가 함께 계시니 / 만왕의 왕 내 주께서